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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판타지 소설의 시작이자 정점으로 평가받는 작품, 바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라자’입니다. 1998년 첫 출간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독자분들께 사랑받아 온 이 작품은, 단순한 판타지 장르를 넘어선 깊이 있는 세계관과 철학적인 메시지로 오늘날에도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판타지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될 명작으로 평가되며, 한국 판타지의 기준을 세운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소년, 위대한 여정의 시작 (후치 네드발, 헬턴트, 사절단)

    『드래곤라자』는 ‘영웅’이 아닌 평범한 소년 후치 네드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후치는 바이서스 왕국의 서부 변방, 헬턴트 영지에서 수습 초장이로 살아가는 17세 소년입니다. 귀족의 혈통도, 특별한 능력도 없는 인물이지만, 상황을 풍자적으로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언변과 인간적인 통찰력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빛을 발하게 됩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라는 블랙 드래곤이 헬턴트 지역을 위협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한 ‘제9차 아무르타트 원정군’이 대패한 데서 시작됩니다. 드래곤의 몸값으로 요구된 막대한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헬턴트 영주는 수도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파견된 인물이 바로 헬턴트 영주의 이복동생이자 냉철한 지성인 칼 헬턴트, 후치의 친구이자 의리파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 그리고 주인공 후치 네드발입니다. 후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 사절단에 합류하며, 그 순간부터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헬턴트 사절단’은 겉보기엔 단순한 외교적 파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후일 대륙의 운명을 뒤흔드는 거대한 여정의 서막이 됩니다.

     

    수도로 향하는 길에서 이들은 정체불명의 여도둑 네리아,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 마법사 아프나이델, 드워프 엑셀핸드, 자이펀 출신 간첩 운차이 발탄, 폐태자 길시언 바이서스 등 다양한 인물들과 얽히며 점차 대륙 전체의 혼란과 권력 다툼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됩니다. 작품 초반부는 후치의 유쾌하고 냉소적인 관찰을 통해 헬턴트라는 소규모 지역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지만, 그 배경 속에는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과 ‘드래곤과 라자’라는 독창적 설정이 예고편처럼 깔려 있습니다. 평범한 소년이 우연과 의지로 거대한 운명을 마주하게 되는 서사 구조는 전통적인 판타지 영웅 서사와 닮았지만, 동시에 기존 공식을 비틀어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후치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지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칼처럼 현명하지도, 샌슨처럼 강하지도 않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서사의 중심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 점에서 『드래곤라자』는 단순한 판타지 소설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성장을 담은 성장소설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직 시작일 뿐이지만, 독자분들께서는 이 평범한 소년의 여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드래곤과 라자의 숙명적 관계 (캇셀프라임, 디트리히, 지골레이드)

    『드래곤라자』의 세계관에서 가장 독창적인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라자(Raja)’라는 존재입니다. 라자는 드래곤과 특별한 정신적·영적 연결을 맺은 인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단순히 드래곤의 조종자나 조력자가 아닌, 드래곤과 운명을 공유하는 ‘동반자’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이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기도 하며, 실제로 라자와 드래곤 사이에는 단순한 계약을 넘어선 정서적 유대가 존재합니다. 라자의 죽음은 드래곤에게 정신적인 파탄을 일으키고, 드래곤의 죽음은 라자의 생명까지도 앗아갈 만큼 그 유대는 강력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판타지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드래곤을 조종하는 인간’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탈피하여, 드래곤과 인간 간의 대칭적이면서도 긴장된 관계를 그려냅니다. 예컨대, 백색 드래곤 ‘캇셀프라임’은 어린 라자인 디트리히 할슈타일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헬턴트에 파견되지만, 결국 아무르타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며, 디트리히 역시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드래곤과 라자의 운명이 단순히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 정서적 공감과 상호 의존에 기반한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대표적 사례는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와 그의 두 명의 라자—돌맨 할슈타일, 그리고 후속 라자인 레니 할슈타일—의 이야기입니다. 돌맨은 드래곤과의 연결이 약해 이별을 택하게 되고, 이후 지골레이드는 갓난아기였던 레니와 새로운 유대를 맺게 됩니다. 하지만 지골레이드가 자식인 해츨링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 리치먼드를 찾아가 결국 파괴하는 서사는, 단순히 ‘강한 존재’로서의 드래곤이 아니라, 감정을 지닌 존재로서의 드래곤을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라자의 존재가 단순히 개인 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드래곤과 라자의 관계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전략 무기로 간주되며, 귀족들은 라자의 혈통을 가진 자녀를 양자로 들이기도 합니다. 할슈타일 후작 가문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드래곤과의 유대를 ‘가문 번영’의 수단으로 활용하며, 300년에 걸쳐 라자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드래곤은 완전한 존재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인간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주기 위한 통로로 라자가 존재한다고 작중에서는 설명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리, 이 아름다운 설정은 종종 이기심과 욕망,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됩니다. 작중에서도 “왜 드래곤 라자만 있고, 엘프 라자나 드워프 라자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메타적인 비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드래곤라자』는 라자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드래곤, 현실과 이상, 감정과 권력 사이의 모순된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이를 통해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선 철학적 깊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자분들께서는 이 라자라는 설정을 따라가며, '연결'의 의미, 그리고 그 이면의 책임과 상처를 자연스럽게 사유해 보실 수 있습니다.

    동료와의 여정, 인간 군상의 대서사시 (샌슨, 칼, 이루릴, 할슈타일 후작)

    『드래곤라자』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을 넘어서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다채롭고 입체적인 인물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촘촘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후치를 중심으로 구성된 ‘헬턴트 사절단’은 각기 다른 배경과 신념, 성격을 지닌 동료들이 모여 하나의 팀을 이룹니다. 이들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모험 그 이상으로, 인간의 다양한 면모와 가치의 충돌, 그리고 이해와 성장을 보여주는 대서사시로 발전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샌슨 퍼시발은 정의감과 의리를 중시하는 순박한 전사로 등장합니다. 27세의 시골 경비대장이라는 단순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며, 후치와는 나이 차를 넘어선 ‘절친’으로 묘사됩니다. 그가 말한 명대사 “저와 말이 후치를 타면 됩니다”는 소설 내에서 유쾌하면서도 깊은 신뢰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습니다. 샌슨은 단순한 힘만이 아닌, 성실함과 인간적인 따뜻함으로 일행을 지탱하는 존재입니다. 반면, 칼 헬턴트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전략가입니다. 헬턴트 영주의 이복동생이자 자칭 ‘독서가’, 타칭 ‘독설가’로서 항상 논리와 지식을 기반으로 행동합니다. 칼은 대륙의 정치적 균형을 파악하고 있으며, 후에 ‘현명함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줍니다. 그의 전략은 단순히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닌,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수준의 깊이를 지니며, 이러한 면모는 독자분들께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은 작품에 등장하는 유일한 엘프 캐릭터로, 아름다움, 지성, 신비로움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처음엔 엘프 특유의 조화로운 세계관에서 오는 거리감 때문에 인간 사회에 어색하지만, 점차 동료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적인 감정에 눈뜨게 됩니다. 특히 후치와 이루릴 간의 미묘한 감정선은 작품의 서사에 잔잔한 여운을 더하며, 초월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교감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전달합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할슈타일 후작은 이 작품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백 년간 드래곤라자의 혈통을 유지하며 권력을 쌓아온 명문 가문의 수장으로, 라자라는 존재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의 행동은 대의명분이나 신념보다도 냉혹한 현실 정치와 권력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드래곤라자가 왜곡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딸인 레니마저 ‘도구’로 사용하려 하는 그의 모습은,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상입니다. 이처럼 『드래곤라자』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판타지 캐릭터를 넘어서, 하나의 완전한 인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갈등하고, 상처받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독자분들께서는 이 여정을 따라가며, 단지 대륙을 구하는 모험이 아닌, 서로 다른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함께하시게 됩니다. 결국, 이 작품은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인 다양한 인간 군상의 집합이며, 그 안에는 우정, 배신, 희생, 갈등, 신념 등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후치의 시선을 따라 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마치 한 편의 인생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독자분들께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드래곤라자』는 판타지라는 장르를 넘어선, 깊이 있는 인간 드라마이자 철학적 성찰의 공간입니다. 평범한 소년 후치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세계와 마주하게 되고, 각 인물들의 서사 속에서 우리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과 맞닿게 됩니다. 단순한 모험담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이상과 현실의 충돌, 그리고 성장과 상실의 감정이 빼곡히 담겨 있는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인생 서사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다시 『드래곤라자』를 펼쳐보시길 바랍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또 하나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드래곤라자는 제가 처음 읽은 판타지 소설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접한 이야기였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었고, 유쾌했고, 때로는 슬프기도 했습니다. 어느새 후치와 동료들의 여정 속에 제 마음이 깊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과 이별한 듯한 허전함이 남았습니다.
    다음 작품을 읽으려고 했지만, 드래곤라자의 여운이 너무 커서 쉽게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으로, 제 마음 한쪽에 오래 남아 있는 ‘첫 판타지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